왕녀 ‘제를린’의 유사시 대역으로 키워진 고아 ‘세이라’는 사랑의 도피를 택한 왕녀를 대신해 타 왕국과의 혼삿길에 오른다.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 호시탐탐 달아날 기회를 엿보는 세이라.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충실히 곁을 지키는 기사 ‘유스티나’가 신경이 쓰여 그녀는 고민에 빠진다. 유스티나와 가까워질수록 차마 자신이 가짜라고 고백할 수 없는 세이라…… 대역 왕녀를 둘러싼 운명의 향방은?
……
“제를린 님…….”
그러다 유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언제 잠에서 깨어났는지 왕녀가 조용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맑고 둥근 눈동자에는 안쓰럽게도 물기가 가득했다. 왜 그러는지, 어딘가 안 좋은지 같은 질문을 할 필요는 없었다. 유스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왕녀는 기다렸다는 듯 작은 몸을 숙여 그녀의 품으로 담싹 안겨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사이에 홧홧한 이마를 깊숙이 댔다.
“……저, 저어!”
대담한 그녀에게 놀라 뻣뻣해진 유스티나의 손이 허공에 고정되었다. 그러나 왕녀는 떨어질 줄 모르고 매달리듯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숨결이 가팔라졌다. 낮에 보았던 순진한 얼굴과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왕녀는 다리 사이를 손끝으로 비벼대며 가늘게 속삭였다.
“잠깐만, 유스티나. 잠깐이면 되니까…….”
“네?”
“어차피 나를 알잖아요. 그때, 이미 당신이 가졌잖아요…….”
“……하, 하지만.”
왕녀가 그녀의 손가락을 세게 그러쥐었다. 고집스레 감긴 눈꺼풀은 이내 파르르 흔들렸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안기는 게 싫어요…… 차라리, 당신이었으면 좋겠어. 오늘밤은 현실을 잊게 해 줘요.”
어지럽게 섞여드는 욕망과 죄책감에 머릿속에 붉은 안개가 피었다.
<본문 中>